늦잠을 자고 일어납니다.
어슬렁대며 어젯밤 설거지 해 놓은 그릇들을 찬장으로 옮깁니다.
손부터 씻고 그릇들을 만져야 하는데 또 깜빡합니다.
남과 다른 순서로 일을 하는 것도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나를 탓하고, 남부터 이해하는 짓은 이제 그만하려 합니다.
나의 새해 계획이기도 합니다.
어제 저녁 퇴근길에 관리비 고지서를 받습니다.
우리 집은 중앙집중식이라 내 맘대로 난방을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거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달보다 무려 12만원이나 관리비가 올랐습니다.
두달동안 내 살림은 적자입니다.
이번달도 또 적자가 나겠습니다.
뒤늦게 여수로 향합니다.
도시락을 사서 나갈까도 생각하지만 그럴만한 에너지는 없는것 같습니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맛있는 걸 먹고나면 기운이 날 것도 같습니다.
여수로 가는 길은 꽤나 먼 길입니다.
말없이 먼 길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
항일암에는 늦은 저녁에 도착합니다.
이미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졌지만 우리는 조용히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한적함이 기분 좋습니다.
지난 한 주간의 수고로움이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해서 꼭 무엇을 해야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때 가장 나다운거 아닐까?"
우문현답같은, 때로는 동문서답같은 대화를 띄엄띄엄 이어갑니다.
꽤 경사진 길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숨이 찹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 날들이 많아서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움직이기도 싫어집니다.움직이지 않으면 더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 드는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밤이 되면 좀 나아지는 것 같아."
"그렇지."
"너도 그런 기분 알아?"
"알지. 밤의 미학이랄까."
"오. 멋진데?"
"그럼 멋지지."
초라한 골목길이지만 노란 불빛 아래에서는 괜히 운치있어 보이는 것도
낮이 아니라 밤이기에 가능합니다.
낮에는 보잘것 없던 내 모습이지만
불빛 가득한 밤이 되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멋져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저거 다 내꺼면 좋겠다."
"저걸 다 가지면 해야할 일이 많을텐데."
"사람들 시키면 되지. 나는 사장이 되는거니까."
"사람들 잘 하나 일일이 신경쓰다가 또 징징댈려고?"
"그렇지? 아무래도 저걸 다 가지기엔 능력이 좀 모자란가?"
"능력이 모자란게 아니라 사람들을 시킬줄 모르는거지."
"ㅋㅋ 괜한 걱정이야. 저걸 다 가지는 일이 없을테니까."
"그럴까? 저걸 다 가지는거 말고 원하는 건 없어?"
"배고프다. 빨리 내려가서 밥먹자. 맛있는 걸로!"
"그래. 그러자. 식당들 다 문닫기 전에."
아직까지는 우리들의 밤은 아름다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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