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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리뷰

버닝-가슴을 태우는 영화

by 미주양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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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마임이다. 나 요즘 판토마임 배우고 있잖아."

"그런걸 왜 배워? 배우 될려고?"

"배우는 뭐 아무나 하냐? 그냥 재밌어서 배우는거야."

"봐봐.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잘하네 재능있네"

"이건 재능으로 하는게 아니야"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없어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차이점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프리카 칼라하리의 부시맨에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어.

리틀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가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거를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대.

 

대부분의 우리는 그레이트 헝거일지 모르지만

극소수를 차지하는 저 상위계급은 다수의 우리들에게 리틀 헝거로 살아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이 집은 북향이어서 늘 춥고 어두운데 하루에 딱 한번 햇빛이 들어와

남산 전망대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돼서 여기까지 들어와

 

이론상 하루의 절반을 차지하는 햇빛을

하루 한 시간도 겨우 운이 좋을 때에만 볼 수 있다면

세상은 분명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

보일이. 새끼 때 지하 보일러실에 버려져서 울고 있는걸 내가 데려왔거든

그런데 우리 보일이는 낯선 사람이 오면 어딘가에 숨어서 절대 안나와

자폐증이 좀 심해갖고

보일이도 상상속에만 존재하는거 아니야? 너 없을 때 내가 여기와서 상상속에 고양이한테 먹이를 줘야하는거 아니냐고.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걸 잊어먹으면 돼?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진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믿고 싶은 진실은 정해져있다.

저는 미국에 새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국민에게는 최고의 복리를

근로자들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받게 할 것입니다.

 

우울과 좌절이 넘쳐나는 분위기 속에서

울리는 트럼프의 연설은 역설적이다

진짜 또라이였다. 원래 또라이가 소설 주인공이 되잖아.

파주 제일 고등학교에서 전체 일등이었어. 성적말고 자존심이.

중동에서 개고생하고 왔을때 내가 그랬다

그 돈갖고 강남가서 아파트 한채 사두라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안한대 그 자존심때문에

고향에서 축산업한다 어쩐다 다 말아먹고 지금 저렇게 됐잔항.

지금도 그래. 피해자한테 싹싹빌고 반성문쓰고 판사한테 탄원서 써야 집행유예라도 바랄수 있는데.

안한대잖아. 고집부리고

그래서 너 보자고 한거야. 아버지 면회가서 잘 말씀드려봐.

그 성질 죽이고 반성문 좀 쓰시라고.

일반적이지 않으면 또라이가 된다.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그렇다.

 

또라이가 아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일반적이지 않아야 하는 그룹은 정해져있다.

그들의 특별함은 재능이지만 우리들의 특별함은 꼴난 자존심이다.

그 꼴난 자존심을 지키고 사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더 평범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자존심 따위는 버려야한다.

칼라하리 사막 가는길에 선셋투어 코스가 있어. 사막에 해지는걸 보여주는건데 그냥 주차장 같은거야.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만 쌓여있어. 다른 사람들은 같이 있는데 나만 혼자잖아.

혼자라는 생각. 나혼자 여기까지 뭐하러 왔나싶고. 그런데 해가 지는거야

저기 끝없는 모래 지평선에 노을이 지는거야

처음에는 주황색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피같은 붉은 색이었다가가

그러면서 보라색 남색이었다가 그러면서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사라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거야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예 사라질 수 있으면 좋겠다

 

사라지고 싶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흔적조차 남기고 싶지 않다.

아무 고통 없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문득 가슴이 막힌다.

무거운 돌덩이 같은 것이 숨구멍을 막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끝날듯 끝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

그러니 어쩌나. 버텨야지. 버티고 또 버텨야지.

그 말 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실망스럽더라도 그래도 어쩌나.

버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종수씨가 소설을 쓰신다니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는 역사가 된다.

하찮은 것 같지만 소중하고 가치있는 나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는 생각.

저 사람 나보다 몇 살 더 많아? 여섯살? 일곱살?

어떻게 하면 젊은 나이게 저렇게 살 수 있지?

여유있게 여행다니고 포르쉐 몰고

젊은 나이라도 돈이 많나보지

위대한 개츠비네

 

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정말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다.

그 개츠비들은 모두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몇 십억이나 되는 집들을 사고

몇 천만원이나 되는 가방들을 사고

몇 백만원이나 되는 옷들을 사고.

백화점에만 가면 나는 그 개츠비들을 보며 정신줄을 놓는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의 결말은 얼마나 슬펐던가.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나는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 하우스를 골라 두 달에 한번쯤 태워요. 그 정도 페이스가 나한테는 좋은것 같아요.

당연히 남의 꺼죠. 말하자면 범죄 행위죠.

종수씨와 내가 이렇게 대마초를 피우는 것처럼. 명백한 범죄행위.

그런데 아주 간단해 진짜.

석유를 뿌리고 성냥불만 던지면 끝. 다 타는데까지는 10분도 안 걸려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안 잡혀요. 절대. 한국경찰이 그런 데 신경 안쓰거든요.

한국에는 비닐 하우스들이 진짜 많아요.

쓸모없고 지저분한 비닐 하우스들.

그런 것들은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그런 비닐하우스들을 태우면서 희열을 느끼죠.

쓸모없고 불필요한 건 형이 판단하는 건가요?

판단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그것들이 태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건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해?

거기엔 옳고 그름이 없어요.

자연의 도덕과 같지.

 

나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들이.
누구에게는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분노가 솟구친다.

하지만 그러한 분노를 억누르고만 있으면.

분노는 마비되어 경직된다.

그럼 나의 목숨과도 같았던 것들은 이제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기만 할뿐.

아무런 의미도 띠지 못한다.

분노하라

분노하지 않으면 내 것을 지키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사실 여자들은요 돈 쓸 데가 정말 많아요

여자는 힘들다구요

화장하면 화장했다 뭐라하고 안하면 안했다 뭐라하고

야하게 입으면 야하게 입었다 뭐라하고 대충 입으면 대충 입었다 뭐라하고

그런 말 아세요?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여자를 위한 나라를 기대해 본 적은 없다.

여자지만 여자를 위한 나라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여섯째라서, 아들이 아닌 딸이라서.

출생과 동시에 차별을 받았었다.

다만 잊고 살았을 뿐.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또는 남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듯 당하고 살아야 되는 여러 불편들은 끄집어 내어 말하고 말하고 말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분명한건.

그들만의 나라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는 아직 무슨 소설을 쓸지 모르겠어요.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기 같아요.

세상의 한 부분이긴 한걸까.

내가 이 세상에서 티끌만한 무엇이기는 한걸까.

열려고 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도 궁금할 것도 없는 세상.

작품 속에서 벤이 불태운다던 비닐 하우스는 메타포겠지.

그 비닐 하우스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을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자들이었을까.

종수는 벤을 살해하고 불태우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종수가 불태운 것은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그리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수많은 개츠비들에 대한.

분노. 또는 경고가 아닐까.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영화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역작이다.

"하루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포크너의 이야기"

 

이제 진실을 이야기해 봐

거짓과 위선이 곧 진실이 되는 세상에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는 모순이다.

다시 바꾸어 말한다면

진실을 이야기한다해도 그 진실은 다시 거짓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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