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닌은 늑대입니다. 철학 교수인 주인공은 10년 넘게 브레닌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습니다. 늑대답게. 브레닌은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때문에 강의를 하러 갈때도 어쩔수 없이 브레닌은 주인공과 함께 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학생들에게 브레닌의 인기는 만점이었구요. 그리고 브레닌이 떠나 버리고 없는 지금. 주인공은 브레닌이 내게 가르쳐 준, 그리고 나를 깨우쳐 준 것들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철학자와 늑대는 인간과 늑대의 공생 과정을 담아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영화 “늑대와 춤을”이 생각납니다. 남북 전쟁과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미 육군 중위인 존 덴버가 파견근 무지인 서부에서 라코타 족과 접촉하여, 결국 라코타 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때 케빈 코스트너가 맡았던 덴버는 인디언들에게서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망망대해처럼 뻗은 벌판에서 덴버는 늘 곁을 서성이는 “늑대”를 통해 인간 본연의 모습,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동화하게 됩니다. “상대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으며, 그 대가로 나는 어느 정도를 해 주어야 하는가?”라는 원칙에 익숙한 인간이 대가없는 따뜻함을 늑대에게서 느끼며 자연의 일부가 되는 모습은 결국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합니다. 어쩌면 브레닌은 주인공에게 그런 늑대가 아니었을까요?
"나는 늑대가 인간 영혼의 빈터와 같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늑대는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 숨은 이면, 즉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 그 자체를 보여 준다. 우리는 늑대의 그림자 속에 서 있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방법은 두 가지다. 빛을 거나 아니면 광원이 되어 다른 물체에 막히는 것. 나는 사람이나 빛이 만드는 그림자를 말하고자 한다. 늑대의 그림자란 늑대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아니라 늑대가 발하는 빛 때문에 인간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그림자 속에 서서 우리를 뒤돌아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이란 동물에 대비한 인간의 우월성을 말합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동물은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우월성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인간처럼 다른 영장류도 사랑을 합니다. 단순히 종족 보존을 위해서 동물이 섹스를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보노보노들에게 섹스는 종족 보존 그 이상의 감정표현입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만이 죽음을 슬퍼할 수 있을까요? 인간에게만 친구가 존재할까요?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동물의 왕국 뿐만 아니라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기만 해도 그런 감정들이 인간에게만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계산하고 이득을 따져서 모든 관계를 비용과 편익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동물이 따라올 수 없는 행위일까요?
미국법에 의하여 순수 혈통의 늑대를 사고팔거나 기르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함께 기르던 늑대 한 쌍을 데리고 이주해 온 늑대의 주인은 “96%”늑대개라고 광고했지만 사실 그것은 순수 혈통의 늑대였습니다. 주인공은 예상치도 못한 늑대를 집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작은 강아지를 처음 집안에 들여놓는 것만 해도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닌데 늑대가 집안으로 들어왔으니 상상초월의 일이 벌어집니다. 늑대의 집중력은 30초를 넘지 못합니다. 상상해 볼 수 있나요? 내 덩치보다 큰 늑대가 이러 펄쩍 저리 펄쩍 뛰어다니는 모습을!
사람이 남에게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개들도 마찬가지다. 왜 복종해야 한단 말인가? 훈련의 핵심은 다른 선택이 없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기 싸움으로 굴복시켜 비참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불가피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훈련의 목적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익숙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은 나의 생활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환경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낯선 환경에 떨어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낯섬에 겁을 먹고 방어적이 됩니다. 이 때 누군가가 내 옆에 서서 내가 걸음을 내딛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동물에게만큼은 나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내가 너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행동인 것입니다. 하여간. 늑대를 키울 생각이 있다면. 개를 대하듯 늑대를 대하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실험을 통해 늑대는 캐보다 수단과 목표를 추론하는 데 더 우월며 개는 지시나 훈련이 필요한 임무에서 더 뛰어나다고 합니다. 즉, 늑대는 여러 역학적 상황을 고려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것입니다. 반면 개는 이런 여러 복합미묘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인간의 도움을 구합니다. 개의 입장에서 보자면 적절하게 간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어떤 면에서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꺾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이든, 인간이든, 늑대이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규율이 필요하고 이를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훈련은 바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율을 세워나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물론 야생의 늑대를 인간의 생활에 맞추어 훈련시킨다는 것은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늑대가 인간과 함께 살고 싶다는 사를 표현한 적이 있었나요? 어느날 갑자기 늑대 브레닌은 야생에서 인간 사회 속에 들어오게 되었고 자신의 뜻과는 상관이부모와 떨어져 새로운 인간 주인을 만나게 되었을 뿐이니까요. 이 쯤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게 되었니다. 작가는 늑대를 통해서 인간 본연의 정신을 찾았고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작가의 의도였을뿐 브레닌의 의도는 아니었을테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개를 훈련시키는 것, 특히 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꺾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나 늑대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 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리고 브레닌에게는 내가 그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자유 사이의 관계는 심오하고 중요하다. 규율은 가장 소중한 자유의 형탤르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다분히 인간 사회의 입장이지요? 하긴 늑대소년을 생각해 보면 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가 늑대를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자랐을 때 그 아기는 늑대의 규율에 맞추워 살아왔고 결국 인간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였으니까요. 누구에게나 익혀야 할 환경이 있으며 그 환경의 주인이 인간이냐 동물이냐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훈련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다면 이 책을 읽기는 거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죽 읽어나간다면 꽤나 심도깊은 철학서가 되기도 합니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도 야생동물 한 마리쯤은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불현 듯 하게 될수도 있다는 위험(?)을 배제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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