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월 7일 아침 여덟시 십분.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6박 7일의 남쪽 지역 순방 일정에 오릅니다. 고위직 아흔 명가량이 황제의 수행원 자격으로, 그리고 통감부의 고위직과 주둔군 장교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 자격으로 그 길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이토는 수원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순종과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토의 길은 세계 정복을 향한 일본의 무력이었고 순종의 길은 충절과 법도와 인륜의 길, 그 시대로 보았을 때는 허망하고 뜬구름 잡는 길이었습니다. 이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 또한 그러합니다. 고래의 길이 현재에 닿아서 미래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철로가 그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이 말하는 길은 이미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이고 이제는 버려야 할 길이니 일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을까. 부산에서 나가사키로 운항 중인 일본의 배에 오른 순종은 그 위대함에 잠시 넋을 놓았을 때 백성들은 순종의 안위를 걱정하며 통곡을 합니다. 배에 오르지 마시라, 저들이 당신을 일본으로 끌고 갈까 걱정이니 전하, 배에 오르지 마시라. 그러나 순종은 그들이 왜 그 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지를 이토에게 오히려 묻습니다. 알고도 그랬을까. 아니면 이토의 의중을 알고 싶었던 걸일까.
“폐하의 안위를 염려하는 무리입니다. 이제 군함에 오르셨으니 만안하십니다.”
이 날 영접은 선실이 아닌 갑판에서 열렸습니다. 테이블 중앙에 이토와 순종이 나란히 앉고, 그 양쪽으로 해군 장교들과 관료들이 마주 앉아 마치 편안한 대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토는 일본이 사진사에게 근접 촬영을 하도록 하여 이토의 힘과 그 힘에 따라 움직이는 순종을 보이도록 연출한 것입니다.
연출 사진이라. 요즘 우리들이 흔히 보는 사진이기도 합니다. 인위적으로 구도를 잡고 만들어 그들이 원하는 장면을 국민들이 알게 함으로써 국민의 시선을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돌리는 것입니다. 참. 일본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방에 연이어 서북행 순행까지 이토는 순종에게 요구합니다. 압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압박이었을 것입니다. 이토는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하얼빈, 북경, 모스크바, 유럽으로 뻗어가는 철로를 만들어 메이지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고 싶었고 그것으로 일본의 세계 정복에 자신의 공을 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오버랩되는 그들의 순방. 화려한 옷차림과 사진, 사진 그리고 또 사진.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연이은 순방과 연이은 방문. 그리고 또 빠지지 않는 사진.
서북행의 순방길에 순종이 오른 이유는 고려 오백년의 도읍지였던 만월대를 오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순종과 이토의 목적이 달랐으며 이것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려조의 폐허를 보니 홍건적의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사백 년을 경영해온 고려 대궐이 무너진 지 오백 년이 지나 풀밭이 되었다. 돌들은 이제 고요하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흥망보다는 폐허가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라고 이토가 말합니다.
“고려 왕이 파천하고 왕궁이 불탔지만, 고려는 곧 개성을 회복하고 적들을 압록강 밖을 내몰았다. 주춧돌을 보니 심란하다.” 순종은 지금 조선이 일본의 총칼에 휘둘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너희를 이 땅에서 내몰것이나, 지금 이런 처지에 있는 내 마음은 너무나 가슴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에도 이토는 연출 사진을 지시합니다. 폐허는 크게, 조선 황제는 작게. 그리고 군도를 찬 일본군 장교들을 병풍처럼. 돌계단을 내려오는 황제의 대열이 흐트러졌을 때, 마치 그 대열이 폐허와 배경을 이루었을 때. 사진사는 셔터를 누릅니다.
일본 기선에서의 사진과 만월대에서의 사진 두 장은 한쌍으로 묶여서 일본, 조선, 그 밖에 여러 나라의 언론기관에 배포됩니다. 힘없는 조선. 비틀거리는 조선을 이끄는 순종의 기백없는 표정은 일본의 품안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일본이 그런 조선을 보호하는 것처럼. 아무 의지도 없는 왕을 믿고 있는 백성들을 구해주려는 것처럼. 연출된 사진의 효과는 무서웠습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연이어 출간하면서 필체의 힘을 여실히 드러냈던 작가 김 훈의 오랜만의 작품입니다. 인간 안중근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그의 말처럼 단순히 영웅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삶을, 그리고 난세를 헤쳐나가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 미약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장면들은 그저 가슴이 메입니다.
이 책이 지금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이 교정에서 최루탄을 맞고 뛰어다니던 그 젊은 시절과 교차되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씨 문중들이 함께 모여 사냥해 온 노루를 안주삼아 술을 한 잔 들이키고 하는 말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몇 발로 잡았느냐?”
“한 발 쐈습니다.”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
언론은 예나 지금이나 강자의 편에서 강자의 목소리를 냅니다. 언론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은 그들조차 설 자리가 없을 때입니다. 이러다가는 자신들도 밥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상 언론은 돈 앞에 그리고 힘 앞에 굴복합니다.
“일본이 청을 무찌르고 러시아를 무찔러서 조선의 독립은 탄탄해졌다고, 한다하는 식자들이 신문과 강연으로 필설을 펼쳤다.” “지난 목요일 전투에서 일본군 열두 명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선의 의병은 반란군으로 지칭되어 영문판으로 돌려졌고 이 말 한마디에 조선 군중은 의병을 곡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문경의 이 강년. 열아홉살 청년 신돌석, 원주의 이인영, 이은찬. 벼슬을 버리고 싸움에 뛰어들었던 최익현. 그들은 모두 무너져가는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지만 일본의 총칼 또는 동료의 배신으로 결국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란군으로 지칭되다니. 일본에 대한 반란이란 말도 맞지 않고 조선에 대한 반란이란 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숨 부지하기 바빴던 언론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기사를 썼으며 훗날 그에 대한 변명은 구차했을 것입니다.
<하얼빈>은 단순히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일 수 만은 없습니다. <하얼빈>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든 역사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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